1.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설날을 앞두고 사장님께 인사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투다리에 갔다.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한 후 조금씩 잔에 채워 느긋하게 홀짝이고 있는데 이인조로 보이는 남녀 두조가 한팀으로 들어와 내 자리 근처에 착석했다. 애당초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들린 것도 아니고 페이스를 더디했더니, 마른 정신에 가까운 자리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원치 않아도 귀에 들어왔다. 음악이나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아이팟을 꺼내는데 아까 그 남녀 두조 가운데 한 남자의 주관(酒觀)이 들렸다. 나도 술이라면 살짝 마시는 터라 어디 좀 들어볼까 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자랑스럽게 자신의 음주력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남자를 지켜보던 한 여자(남자와 한조로 보이는)가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는 웃음에 머쓱해진 남자가 말을 멈췄고 테이블의 분위기는 급동결되어버렸다. 여자는 담담하고 경쾌하게 물었다. "주량 센 게 왜 자랑이야?" 남자는 뭔가 그럴싸한 대답을 찾아내고 싶었겠지만 여자를 납득시킬 만한 것은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다시 여자가 한층 더 가볍고 야무지게 물었다. "술 세서 뭐하려고?" 직접적으로 질문을 받은 남자는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순간 나는 엄청난 쇼크를 받았다. 누가 날 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낯이 달아올라 서둘러 아이팟을 깨워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소주를 잔에 가득 채워 입속에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그래, 그지. 주량 센 게 왜 자랑이야? 진짜 술세서 뭐해? 접대부도 아니고. 아니, 접대부라도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는 게 뭐 자랑이야. 재주껏 적당히 마시는 게 똘똘한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니 막 화가 났다. '아 시발 왜 나한테는 저런 얘기를 아무도 안해준 거야. 내가 이런 진리를 나이 사십 먹어서 겨우 귀동냥으로 터득해야 되는 거야!' 그래서 또 그 날은 술을 죽도록 마셨다.
2.
연애걸고 싶은 여자, 魚喃キリコ (Kiriko Nananan)
: 노먼 록웰의 그림과 영화 바그다드 카페, 그리고 킹크스와 더 스페셜즈의 음악을 좋아하는 여자 - 키리코 나나난.
이케와키 치즈루를 싫어했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이름만 들어도 토혈까지 할 만큼 싫어했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이케와키 치즈루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견딜만 해져버렸다. 죽을 때까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참 시간이라는 것이 무서운 게 어지간한 건 죄다 시간의 흐름에 닳아버리곤 한다. 분노도, 슬픔도, 아픔도, 후회도 모두 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겨우 이딴 것 때문에 피까지 토해가며 울었나 싶어 분하기도 해 치즈루가 나오는 뭔가 다른 걸 하나 더 봐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찾게 된 것이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였다. 그런데 막상 구하고 나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며칠을 미간에 川자를 파고 다녔더니 누군가 이유를 물었고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그래? 그럼 원작부터 볼까 하고 책장을 후루룩하고 펼친 순간 와- 이런 느낌 너무 좋아 하고 감탄을 해버렸다. 살아있는 펜의 느낌. 자를 누르는 손끝의 느낌. 힘이 밴 옅은 숨결의 느낌. 그렇게 단숨에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08년의 일이다.
아아,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눈을 감고 멍하니 걸어가다 넘어졌는데
순간 들장미 향기가 물씬 피어나는 숲 속에
엎드러져 있는 듯한...
고개를 숙이고 멍하니 걸어갔는데
순간 하늘에서 10톤의 에메랄드가 눈앞에 떡- 하니 떨어져서
앞길을 꽉 막아버리는 듯한...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나를 가득 채워줄 거야.
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사랑이 나에게 찾아 오겠지?
신이시여,
나는 그 사람이 좋아요.
나는 그 사람을...
너무나 사랑해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만약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말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테니까.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죽어버릴 거야.
웬일인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감정이란
입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결국 제멋대로
다른 출구를 찾아내 버리고 만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굳이 애써서
알려고 하기엔...
나는 지금
너무 지치고 피곤하다.
오늘은 하루에 13만엔을 받았다.
이것저것 다 떼고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9만엔 쯤 된다.
나의 가치는 하루에 9만엔 정도 되는 걸까.
나 같은 건 지금 당장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내가 있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난 잘난 척 한 게
아니라...
단지...
내 그림이
너무 소중하니까
그런 것 뿐이야.
정성껏 그린
내 그림이
소중히 다뤄지길
바라는 게
뭐가 나빠?
평화로운 오늘이 감사하지만
이렇게 재미없는 일상의 평온을
공감할 수 있는 당신이..
- 아주 많이 간절해.
이윽고...
머릿속이 까마득해지는
순간이 찾아와
- 우리는 섹스를 했다.
너무나 괴로워서
누군가도 꼭
나만큼 괴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도...
나와 똑같은 상처를 받길
바라게 된 것이다.
너도 나만큼 아프길 바랬어.
너도 나만큼 죽도록 아파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상처받지는 않을 텐데...
어쩌면...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나를 소중히 하지 않았던 건
바로 내 자신이었는지도 몰라.
- 나 같은 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in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은...
세상에 넘쳐나는 것 같지만
사실 아주 부서지기 쉽고
<기적>이 없으면
지키기 어려운 거야.
in 호박과 마요네즈